사는 이야기

레전드 결혼생활의 끝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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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년 겨울 쯤 병원에서 처음 통보를 받았다. 병명은 악성 뇌종양, 여기저기서 흔히 듣던 병명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믿기지가 않았다.

집에 가서 정말 미친듯이 울었다. 하루종일 울고, 또 울고. 그러면서도 혹시 들을까 걱정되어 숨죽여 울고. 하늘을 원망하고 너를 원망하며 한동안 슬픔에 잠겨 살았다.

그렇게 울다가 깨달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그 시간만이라도 예쁜 꽃길만 걷게 해주자고. 내가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으나 너도 아마 내 생각을 알아챈 것이었겠지.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이미 너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마 내게 미안한 마음이 제일 컸던 것 같다.

다만 너는 나를 바라보며 무너지고 있었기에,

아주 잠깐, 내 몸에 기대어 버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 봄은 유난히도 벚꽃이 예쁘게 피었다. 술과 안주거리를 잔뜩 싣고 꽃놀이를 갔다. 캔맥주와 안주를 박스채로 들고가서 온갖 진상을 다 부렸다. 연애할 때는 거의 연례행사로 자리잡았던 꽃놀이지만, 결혼 후에는 각자의 일에 치여 거의 가지 못했었는데, 오랜만에 가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서로가 소년소녀였을 적부터 보고 자란 벚나무에 등을 기대고 한참을 떠들어댔다.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그리도 재밌던지, 한참이나 내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던 너였다. '그때 너 진짜 병신 같았어, 이 찌질아.' 따위의 심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그녀였다. 하지만 난 그런 네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저도 아는대로 흑역사를 꺼내 놀려댔고, 그렇게 한참을 싸워대다가 결국 입술을 맞추었다.

여름에는 못해도 2주에 한번씩 계곡이나 바다로 떠났다. 너는 더위를 싫어하는 내 성격을 알면서도 꼭 놀러가자며 온갖 난리를 다 피워댔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여름이었기에 화도 내지 못했다.

본 건 많아서 마트에 갈 때마다 수박을 두드려대는 통에, 꼭 한통씩 사들고 갔다. 그렇게 좋다고 수박을 들고 가다가 5분도 안되서 무겁다며 내게 던지듯 맡기고 도망가곤 했다. 그런 뒷모습을 보다가 또 피식 웃고, 뭐가 웃기냐며 또 한소리 듣고.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던 너는 의외로 수영이 영 젬병이었다. 발목을 잡고 물로 끌어내리면 진심으로 무서워 하곤 했다. 네가 무서워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어서, 난 틈만나면 너를 끌어당겼고, 기겁하는 모습을 보며 낄낄 웃어댔다. 그러니까, 네가 내 그곳을 걷어차기 전까지는 말이지.

가을에는 뒷산 가득 깔린 낙엽을 침대 삼아 지냈다. 나는 간이 탁자와 의자를 두고 소설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었고, 너는 내가 나무에 메어준 해먹에 누워 폰을 보다가 틈만나면 말을 걸어왔다. 그런 너에게 대충 웃어주고 다시 책에 집중하려 하면, 어디서 분위기를 잡느냐며 거하게 얻어맞곤 했다.

별이 총총 박힌 가을밤은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광경이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밤 뒷산에 나가 누웠고, 담요를 나눠 덮었다. 머리를 맞대고 누워서 끝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말수가 적어지고, 대화도 드문드문 이어졌지만, 우리는 꼭 웃음을 터뜨렸다.

초겨울에는 곧 내릴 첫눈을 기다리며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우리 둘 다 사직서를 낸 상태라 남는 게 시간이어서, 흘러간 영화를 보거나 2000피스 퍼즐에 도전하는 등 참 여유롭게 보냈다. 너는 눈이 나빠져 종종 안경을 쓰곤 했는데, 안경 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진심으로 싫어했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여자였다.

그렇게 기다리던 눈발이 내릴 때면 꼭 밖으로 나가 눈싸움을 했다. 열심히 눈을 굴리던 너의 뒤로 살금살금 걸어가서 귓불을 살짝 깨물면, 꼭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내 옷속에 눈을 마구마구 퍼넣었다.

덕분에 그 겨울에만 감기를 한 세 번쯤 붙였다 뗐다 한 것 같다. 키스가 일상이던 우리가 함께 앓아누운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이따금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난 보고도 못본 척 하며 일부러 밝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개나리가 예쁘더라.'

'오늘은 유독 구름이 많아 선선하더라.'

하고.

너는 그럴 때마다 소리없이 고마워했고, 나는 말없이 웃었다.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상을 연기했다. 평범한 생활을 조작해서 식사하고 산책하고 웃고 떠들었다. 말을 주고받았고, 살을 섞었고, 부끄러워하고, 토라지고, 화해하고. 그러다 또 어쩔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정된 행복에 소리없이 몸부림쳤다.

그렇게 시간은 봄으로, 여름으로, 가을로, 겨울로 흘렀다.

의사가 말했던 6개월은 이미 훌쩍 지난 상태였다.늘어난 시간 만큼이나 새로운 추억이 생겼고, 다시 그것에 의지하여, 너는 열심히 버티고 있었다.

우리는 많이 힘들어했고,

서로가 모르게 참 많이 울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웃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

13개월.

네가 온 힘을 다해 견뎌 준 시간이었다. 의사는 정말로 기적이라고 말했고, 나는 너에게 마냥 고맙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가서 결국 발작이 잦아져 병원에서 지내던 너였다. 너를 볼 때마다 답답하게도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나를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 뻔히 보여 차마 나무랄 수가 없었다.

다가오는 이별에 우리는 점점 망가져 가고 있었다.

무던히 춥던 꽃샘추위의 어느 봄날, 결국 나는 너를 떠나보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섞인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밝던 너였던 만큼 웃음과 함께 떠나는 것을 정말 다행히 여겼다.

"나 없이도 잘 살아야 해. 다른 여자 만나서 재혼해. 넌 돈도 잘벌고, 키도 크니까.얼굴은 조금 별로지만 괜찮아. 그래도 성격은 된 놈이니까. 알겠지?"

네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언어는 내 마음을 적시는 가랑비가 되고, 내 안에 쌓이는 함박눈이 되어 끝없이 나를 너에게 담구었다. 그 기약없는 물들임에 나는 한참을 그렇게 눈물만 삼켰다.

비익조(比翼鳥)는 눈과 날개가 하나뿐이라, 암수 짝을 이루지 못하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 속의 새다. 문득 펼친 책에서 이 구절을 읽고 내가 너를 떠올린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눈을 감고 천천히 너를 처음부터 그린다.

마냥 세상이 커보이던 5살에 처음 서로를 만났고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함께 세상을 배웠으며

아직은 어리던 중학교 2학년에 고백을 받고

그렇게 학창시절을 서로만 보고 지내서

대학교 졸업 파티에서 프러포즈를 받아

한 남자의 아내로서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 받았던

나의 그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여전히 너에게 젖어 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242052232664754&id=206910909512230

2020-05-13 16:46
코멘트
돈많은 미술교사 4년전
0 0 댓글
해피엔딩은아니지만..부럽네
근육질의 평판사 4년전
0 0 댓글
일단, 지금은 회사라 집에가서 읽어볼게요..
하루죙일 글만보니까 눈이 터지겠어요
인기있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4년전
0 0 댓글
회사에서 보다가 몰래 눈물 훔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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